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구 황후 (문단 편집) == 일본서기 내용상 행적 == * [[이주갑인상]] 등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순수하게 일본서기 내용만 따라가면 진구 황후의 생애는 아래와 같다. 천황 재위년 옆에 병기한 서력기원 표기는 이주갑인상을 고려하지 않고 일본서기의 모든 내용이 사실이라 간주했을 경우의 연도이다. 고사기에서는 이야기의 큰 틀은 같지만 더 간략하고, 일본서기의 내용과 세부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다. 진구는 [[세이무 덴노|세이무]] 40년(170)에 태어나 스물네 살 되는 [[주아이 덴노|주아이]] 2년(193)에 주아이 천황과 결혼하여 황후가 되었다. 주아이 8년(199) 9월, 주아이 천황이 신하들과 함께 [[구마소|쿠마소]](熊襲)[* [[규슈]] 남부, 오늘날 [[구마모토현]] 히토요시시(人吉市) 근방에 살던 고대의 민족. 또는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가리키는 호칭이다.]를 토벌하는 문제를 신하들과 논의하였는데, 그 자리에 동석한 진구에게 뜬금없이 신령이 지폈다. 이때 신령은 (진구의 입을 빌려) 주아이에게 쿠마소는 정벌할 가치가 없고, 바다 건너 '신라'라는 나라가 있으니 자신에게 제사를 지내면 전쟁을 하지도 않고 복속되리라는 신탁을 내렸다. 하지만 주아이가 그 말을 믿지 않자 신령은 '내 말을 믿지 않으므로 너는 그 나라를 얻지 못할 터이나, 지금 황후가 임신했으니 그 아들(미래의 [[오진 덴노|오진]])이 얻으리로다.' 하고 예언했다. 주아이는 신령의 말을 믿지 않고 그대로 쿠마소 공격을 강행했으니 실패했다. 이듬해 주아이 9년(200), 진구가 서른한 살이던 해 2월, 주아이가 어느 날 몸이 아프더니 이튿날 죽어버렸다. 진구는 [[타케우치노 스쿠네]]와 상의하여 주아이 천황이 죽었음을 숨기고 토유라 궁(豐浦宮: 오늘날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 일대)에 시신을 옮긴 뒤 자기가 신라를 정벌할 준비를 하였다. 이때 진구가 신령을 부르는 의식을 치르며 과거 주아이에게 신탁을 내린 신령이 누구시냐고 묻자, 아마테라스[* 일본서기에선 '츠키사키키츠노미나타아마사카루무가츠히메(撞賢木厳之御魂天疎向津媛)'라고 이름을 밝혔는데, 이는 [[아마테라스]]의 아라미타마(荒魂), 즉 아마테라스의 거칠고 사나운 면이 드러난 신격이라고 한다. 신토는 한 신령에게 거친 면(아라미타마荒魂)와 부드러운 면(니키미타마和魂)가 있다고 설명하는데, 둘 다 같은 신령의 다른 면모지만 때로는 이름을 달리 붙이고 다른 신령처럼 모시기도 한다.], 스미요시 3신(住吉三神) 등등 여러 신령들을 언급하였다. 진구는 (주아이에게 처음 내린 신탁 내용대로) 신령들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정벌에 나서기 전에 규슈를 진압하고자 [[타케우치노 스쿠네]]와 함께 진군해서 규슈의 지쿠고가와 상류에 진을 치고 북규슈의 여러 추장들을 복속시켰으며 [[야마토]](山門)의 여추장 타부라츠히메(田油津媛)를 멸망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이 여추장이 [[히미코]]라고 한다.''' [[에도 시대]] 학자 중에서는 본래 히미코가 규슈의 야마토(山門) 출신이지만 긴키의 야마토(倭)를 참칭했다는 추측을 내놓기도 했는데, 이와 연관되었을 수도 있다. 2세기 말~3세기 무렵 긴키의 야마토 왕권 세력이 규슈로 진출해 전방후원분 문화를 퍼뜨린 과정을 표현한 듯하다. 진구가 다시 신령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바닷가에 가서 '내가 서쪽(삼한)을 치려고 하는데, 신령께서 응감하신다면 내 머리카락이 둘로 갈라지리라.' 하면서 바닷물로 머리를 감았더니 과연 머리카락이 바닷물 속에서 둘로 나뉘었다고 한다. 진구는 나뉜 머리카락을 모아 상투를 두 개 틀었다(남장을 했다는 뜻). 9월, 진구 황후는 산달이 되어 아기가 태어날 조짐이 있었는데 돌로 출산을 늦추었다.[* 고사기에는 진구가 돌로 출산을 늦춘 시기를 삼한으로 출발하여 돌아오기 이전이라고 나온다.] 진구는 출산을 늦추고 다음달, 즉 주아이 9년(200) 10월 3일에 출정하였다고 한다. 신라왕은 진구가 이끈 군세를 보자마자 겁에 질려 싸움 한 번 하지 않고 항복하고 호적을 바쳤다. 삼한의 다른 국가도 진구의 군세를 도저히 이길 가망이 없어 보여 스스로 다가와 항복하고 조공을 바치기로 하였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진구 황후/e0079724_4d90a71fd705a.jpg|width=100%]]}}}|| || 진구 황후의 [[한반도]] 침공을 묘사한 오스프리의 그림.[br]일본서기 내용을 거의 복붙하고 있다. || 그리하여 진구는 싸움 한 번 없이 삼한을 굴복시키고는 돌아와 12월 14일에 츠쿠시(筑紫), 오늘날 후쿠오카현 북동쪽에서 아들 [[오진 덴노|오진]]을 낳았다. 일본서기의 묘사를 그대로 믿는다면 진작에 아기를 낳아야 했을 만삭의 임산부가 출정해서 전투 한 번 없이 외국을 정복하고 돌아와 아들을 낳기까지 겨우 두 달 열하루가 걸렸을 뿐이다. 대충 70일이다! 이듬해(201) 봄, 진구는 (토유라 궁에 있던) 남편 주아이의 시신을 모시고 수도로 돌아갔다. 그러나 카고사카 황자(麛坂皇子)나 오시쿠마 황자(忍熊皇子)[* 두 사람은 [[주아이 천황]]이 다른 여자에게서 낳은 아들들이다. 즉, 진구의 입장에서는 남편의 배다른 자식, 오진의 입장에선 이복형들이다.]는 "황후가 서쪽을 정벌하고 돌아와 이제 어린 자식을 임금으로 세울 텐데, 우리가 어떻게 나이 어린 동생을 섬기겠는가?" 하며 반기를 들었다. 반기를 들기 전, 두 형제는 사냥을 하여 그 결과를 보고 거사가 성공할지 점을 치기로 하였다.[* 사냥에서 좋은 짐승을 잡는다면 거사가 성공할 징조라는 것이다.] 형제는 저마다 야외에 임시로 제단을 쌓고 거기서 기다렸는데, 갑자기 붉은 돼지가 나타나 카고사카 황자를 잡아먹었다.[* 옛 일본에서 붉은색은 영적인 것을 상징했다. 따라서 '붉은 돼지'는 현실의 짐승이 아니라 영계에서 온 짐승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고사기에서는 이 일을 두고 묘사가 다르다. 고사기에서는 카고사카가 상수리나무 위에 올라가 있었는데, 갑자기 크고 사나운 멧돼지가 나타나 상수리나무를 쓰러트리고 카고사카를 잡아먹었다고 하였다.] 오시쿠마는 이러한 결과가 몹시 불길한 조짐이라고 생각했지만, 거사를 포기하지는 않고 군사를 주둔한 위치를 바꾸었다. 하지만 진구의 명령을 받고 [[타케우치노 스쿠네]]가 군대를 이끌어 적대하는 군대를 모조리 참살했다. 오시쿠마 황자는 '칼에 맞아 죽느니 차라리 [[논병아리]]처럼 물에 빠져 자살하겠다.'는 노래를 부르며[* [[논병아리]]는 물속 깊숙이 잠수하여 먹이를 사냥한다. 그래서 오시쿠마가 "논병아리처럼"이라고 비유하였다.] 세타(瀨田)[* 오늘날 [[사가현]] [[오츠시]] 세타(瀨田) 일대. [[비와호]]의 남쪽으로 물줄기가 흘러 [[세토 내해]] 쪽으로 빠진다.]의 나루터에서 몸을 던졌다. 타케우치노 스쿠네는 "나룻가에서 물속에 뛰어든 새가 보이질 않아 화가 난다." 하는 노래를 불렀지만, 며칠 뒤 그의 시신이 우지강(菟道河)[* 오늘날 요도가와강(淀川). [[비와호]]의 물이 남쪽 [[오츠시]] 쪽으로 흘러나와 [[우지시]](宇治市), [[오사카시]](大阪市)를 거쳐 오사카만(湾)으로 빠지는 짧은 강이다.]에서 발견되자 "세타의 나룻가에 잠긴 새가 우지에서 잡혔다." 하는 노래를 불렀다. 그해(201) 10월, 진구는 '황태후' 칭호를 받고 섭정을 시작하여 그해를 섭정 원년으로 정하였다. 섭정 69년(269) 4월에 진구가 죽었는데 그때 나이가 100살이었다고 한다. 원래 일본서기에는 진구가 언제 태어났다는 기록은 없으나, 이때 죽어 나이가 백 살이라면 태어난 해는 당연히 [[세이무 덴노|세이무]] 40년(170)이므로 이때로 잡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